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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3. 10.

질투는 나의 힘 (Jealousy Is My Middle Name, 2002) - 박찬옥





"어차피 게임이 안되요. 전에도 그랬어요."
 반복. 게임은 계속되는 것인가? 일상의 단면으로서의 반복은 영화 곳곳에 깔린다. 원상은 내경을 버리고 그녀를 채갔던 윤식(편집장)밑에서 일을 한다. 그러한 원상의 심리는 묘한 곳이 있다. 여자를 사이에 둔 원상과 윤식의 삼각관계는 성연을 통해 반복된다. 하지만 결과는 같다. 마누라한테도 잘하고 애인에게도 잘하면 된다는 식으로 유부남의 로맨스를 추구하는 윤식과, 애인도 지키지 못했고 성연도 잡지 못한 원상이 벌이는 삼각관계의 틀에 정말이지 역전은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질투는 연적에게 느끼는 감정이 아닌 자신이 갖지 못한 모든 것에서 비롯하는 무엇인 마냥 그것의 승리는 애당초 의미가 없었다. 둘 사이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닮아갈수록 로맨스는 한낱 게임에 불과한 것이 된다. 두 여자를 사이에둔 감정, 이미 가진자를 바라보는 못가진 자의 질투는 단지 공유된 경험으로 전락하고 그것의 무게는 일상의 차원에서 가벼움으로 침전한다. 단지 그것은 어차피 안될 '게임'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인간감정은 묘하게 전이되는 속성을 지닌다. 내경도 잃었고 성연에게 애걸하던 일도 헛일이었다. 성연에 대한 마음을 접은 순간 그것은 하숙집 딸에게 향한다. 욕망에 의해 매개되는 관계에 로맨스가 어디 있단 말인가? 빈껍데기 사랑에 삶을 바쳐야할 책임감 혹은 의무감 따위는 간단한 문제다. 윤식의 충고를 듣고 원상은 그녀를 버린다. 그렇게 윤식이 추구하는 빈껍데기 로맨스의 길을 원상도 걸어가는 것이다. 관객은 일상의 차원에서 반복된 관계의 양상, 혹은 그것을 좆던 카메라 논리를 통해 윤식의 딸과 원상 사이에 벌어지게 될 일들을 암시받는다.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남은 건 우리의 일상에서 욕망에 덧씌워진 로맨스라는 하찮은 포장을 발견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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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미친 짓이다 (Crazy Marriage, 2001) - 유하




결혼의 현실과 연애의 이상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인가?

준영
은 결혼에 회의하고, 연희는 물질적 안정과 사랑이라고 하는, 양립하기엔 너무 큰 욕심을 함께 성취하려한다. 어차피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사람이 다른 한사람을 만난다고 하는 것은 확률적으로 우연에 불과하다. 준영에게는 예쁜KFC점원과 언제 올지 모르게 기다리게 하는 연희 둘 중의 선택. 연희에게는 똑같이 한겨레 신문을 말아쥔 두 남자 가운데 한사람. 선택은 그다지 운명적이지 않다.


만남. 둘은 늘 그래온것처럼 증명사진의 웃음을 띠고 몇살? 가족관계. 상투적인 대화를 나누고 상투적인 맞선의 코스를 밟아간다. (개인적으로 이성을 만날때 영화를 보는 것은 상대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속마음의 표현이라 생각한다. 함께 영화를 보고 있지만 그것은 영화와의 데이트다.) 버스를 놓치고, 못마신다던 술에 진탕 취한 둘은 '택시비나 여관비'나 똑같지 않느냐는 완곡한 대화를 통해 서로의 욕망을 실현한다. 둘은 옷을 벗지 않고 성급히(?) sex에 임한다.


"왜 옷을 다 벗지 않지?"

"옷을 다 벗으면 고깃덩어리 같아. 토할거 같애"




욕망의 실현을 위해 완곡한 대화를 나누는 것 처럼. 완전히 까발려진 사랑은 아름답지 않다. 현실은 물질적인 세계에 얽매여 있고 사랑이란 이상은 그것에 덧붙여진 포장처럼 존재한다. 결혼또한 그러한 것이 아닌가? 30여년을 서로 다른 사람으로 지내온 사람이 나머지 반평생 이상의 삶을 함께 하기 위해서 취해야할 배려는 질실보다는 위선이라 말한다. 인간은 어차피 자유로운 존재. 그런데 어떻게 일부일처제라는 욕망의 억압기제를 받아 들일수 있는가? 영원, 혹은 이상적인 사랑이라는 '로맨스의 세계'가 파괴된 듯한 세상에. 사랑의 결과로서 기능해야할 결혼은 이미 그 자체가 억압으로 다가온다.



 

"왜 결혼하려 하지 않아?"
"거짓말하고 살아갈 자신없어."

둘은 간간이 만남을 가진다. 그것은 일상적인 연애를 둘러싼 환상을 파괴하는 형식을 취한다. 솔직하고 진솔한 대화 속엔 결혼에 대한 준영의 회의 또는 두려움이 녹아 있고 연희의 조건, 혹은 사랑 사이의 갈등이 묻어난다.


"날 잡아" .... "아니 그 사람과 결혼할 날을 잡으라고."




선택. 연희는 준영을 떠보지만 준영은 결혼할 마음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연희는 의사 직업을 가진 안정적인 상대와의 결혼 준비를 시작한다. 둘만의 신혼여행에 이르기까지 과정. 거기엔 어쩌면 준영은 연희를 사랑한다는 가정, 연희에게 조건보다 사랑이 더 중요한 것이었다는 상상을 가능케 한다. 연희는 준영과 함께 다른 사람과의 결혼 준비를 함께한다. 연희가 살게 될 안락한 집에서 준영이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 로맨스 영화가 취하는 일반적인 어긋남에 여운을 남기기 위한 플롯의 전개는 둘만의 신혼여행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민박집에서 할머니와 민박 비용을 흥정하는 소박한 모습을 보이는 연희. 아까의 안락한 집과 상반되는 곳. 그곳에서 연희는 더이상 고깃덩어리가 아닌 육체로 준영에게 다가온다. 영화는 이렇게 둘 사이를 비극적인 결말로 매듭지을 만큼 도덕적이지 않다. 그리고 연희의 결혼. 준영은 연희의 결혼 생활을 상상하며 기다린다. 그것은 기다리는 것이다.

연희가 새로운 직장(?)에서 무료함을 느낄 때쯤인가? 연희는 준영을 찾아온다. 둘은 둘만의 공간을 꾸민다. 마치 주말부부처럼 그들만의 신혼여행에 이어 늦은 신혼은 시작된다. 하지만 점차 아름답지만 현실에서 절대 거세될 수 없는 조건이 그 정체를 드러낸다. 친구는 과거의 여자를 잊지못해 결혼생활과 과거 모두에 파경을 맞이한다.


"
이번기회에 완전히 헤어지는게 어때?"


무엇에 대해 헤어진다는 것인가? 둘의 미래는 준영의 중의적인 대사와 연희의 모순적인 태도에 의해 관객이 투영하고 싶은 대로 펼쳐질 것이라는 플롯의 구조를 취함으로서 열린 결말, 혹은 계속될 불륜의 여운을 남긴다.


영화는 결혼, 혹은 사랑의 의미에 관해 묻는다.

로맨스라는 포장이 제거된 준영과 연희의 관계는 냉소적인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한다. 분명한 캐릭터와 상황의 설정으로 단지 불륜이라는 모럴해저드를 상상적으로 소비하고 싶은 관객의 기호에 맞춰진 영화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플롯과 대사의 전개에서 중의적이고 이중적인 요소들을 엮고, 그 여백을 남기는 미학은 실제 영화의 가치 이상이다.

(혹시) 보면 볼수록 더 많은 것을 던져줄지도 모르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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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저격자 (Blood Simple, 1984) - 조엘 코엔




 황량한 텍사스, 음산한 밤을 달리는 자동차. 내가 아는 건 텍사스고 여기서 너는 너야 라고 말하는 Narration처럼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누아르라는 장르보다 단지 이란 개별 영화이고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 영화에 관한 것뿐이라는 옹졸한 변명으로 여명 속 영화보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는 것은 없다. 하지만 항상 여명 속 영화보기가 내게 던져주었던 성찰에 대한 진지한 물음과 그 자세가 아직 남아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참고: 필자는 휴가중인 육군병장...)
 무엇이 우습지?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마티, 레이, 에비. 사건의 당사자들도, 이들 세 사람의 삼각 구도로 결정되는 사건의 내부에 있는 사람(사설탐정)도, 외부에 있는 사람(모리스)도 자신들이 보고 싶어하는 사건의 단면들만을 인식한 채 사건에 엮여 있다. 불안 속에 단절된 듯 엉켜있는 상황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일까? 관객은 모든 것을 보지만 정말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관객에게는 명확하기만 한 사건의 단서들에 갇혀있는 그들을 보며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결국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은 무엇인가? 난 아직도 이 영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에비 vs 레이 : "알고 싶지도 않소. 하지만 당신을 좋아하오."
 에비의 불안은 사건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녀 남편과의 문제의 근본 원인이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진 않지만 그것이 해결을 위해 사건에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레이에게 중요한 건 그녀가 떠안고 있던 문제가 아니니까. 그에게 당장 중요한건 그 문제에 의해 파생된 결과, 그녀의 불안 속에 그의 마음이 받아들여 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만남이 이해를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조건의 결합만을 필요로 한다.
인물들 각자가 처한 상황만이 의미를 갖고 불륜과 살인, 돈이 얽힌 치정극 속으로 얽혀 들어간다. 사건의 시작부터 이미 모든 가능성은 뻔하게만 보이는 듯하지만 영화는 무겁기만 하다. 이 영화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레이 vs 마티 : "너따위와 얘기하고 싶지 않아."

 마티의 외도가 항상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말들과 함께 마티의 불안은 이미 에비의 외도를 의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티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이다. 아내가 떠나가도 버릴 수 없는 건 가게 주인이라는 자신의 존재가 움켜쥐고 있는 힘이다. 에비와 레이의 관계를 알고도 분노하지 않는 마티를 볼 땐 당황스럽다. 이젠 자신의 아내에 대한 무엇도 주장할 수 없을 만큼 가정, 부부라는 가치도 힘을 잃은 것일까. 마티가 분노를 느끼는 건 에비의 상대가 레이라는 것에 있다기 보다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에도 무력하기만 한 자기 자신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마티는 그의 힘을 행사하던 방식대로 사설탐정을 이용하려 한다. 하지만 남은 건 어리석과 비참한 죽음이다. 차라리 그리스 전령의 목을 베는 것처럼 에비와 레이를 죽이고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이 희망적이다. 삶의 조건과 자신의 힘을 포기할 만큼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그것을 더욱 사랑하니까.

 마티 vs 에비 :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에비는 항상 두렵다. 마티가 묻든 레이가 묻든 항상 나도 당신을 사랑한다 대답하는 그녀의 말은 어느 쪽도 믿기 힘들다. 처음부터 인물들 간의 단절은 거역할 수 없는 현실이었으니... 이 영화는 그렇게 희망적일 수 없어서 이제야 막 진심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레이를 죽이고 만 것일까? 진실한 사랑이라는 대안도 부부라는 가치관을 무너뜨리는 한 옳지 않다. 영화는 제일 먼저 마티를 죽이고도 항상 그의 죽음을 가려져 있게 함으로써 에비의 마티를 향한 두려움도 영원히 해결될 수 없도록 조건 지워 놓았다. 마티에 대한 꿈과 단서들의 반복처럼 마티의 존재는 항상 에비의 주변을 떠돈다. 가치관의 상실, 그것은 불안으로 변모하여 우리를 따라다니리라.

 사설탐정 : "내말은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니 당신도 짐작했을 거요."

 사설탐정의 Narration은 영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사건의 삼각구도에서 모든 관계를 매개하는 인물의 Narration과 웃음이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데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인물들의 개개의 욕구 - 레이의 애정에 대한 욕구, 에비의 도피의 욕구, 마티의 돈에 대한 욕구들이 뒤엉켜 사건은 어느새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뫼비우스의 고리처럼 발전하는데, 마티에게 총을 쏘고 순간 한 면을 꼬아버린 존재가 바로 사설탐정이다. 사건의 시작과 끝의 경계는 애매모호하다. 무엇도 명확하지 않은 세상에 부조리란 항상 있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욕구를 향하는 인물들이 처한 세계의 불합리성을 대변하며, 죽는 순간에도 웃을 수 있다. 그의 목은 잘린 뒤에도 기어다니며 사람들 주위를 항상 맴돌 것이다. 그는 카뮈가 되어 관객인 우리를 비웃는다.

 "세상은 불만자로 가득해.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나는 그 Narration을 통해 이 영화는 본질적으로 부조리에 관해 의문을 던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리스처럼 우리는 살인을 직시하지도 않고 돈 문제에도 관여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어차피 사건의 바깥에 있으니까. 두려움을 막 벗어났다는 착각을 하는 에비를 비웃는 그의 목소리가 영화 바깥의 우리에게도 들린다. 살아남은 자에 대한 조롱은 그렇게 관객에게 넘어오는 것이다. 그대, 당신들은 또 어떤 문제를 직하지 못한채 지금 어디서 맴돌고 있느냐 하면서...
영화 속 사건의 명백한 단서들을 보면서 영화를 재미있다고만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진실은 항상 저 바깥에 있으니까. 사설탐정의 웃음이 어울리지 않는 상황처럼 어차피 진실은 우리가 그렇다고 믿고 싶어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자들의 냉소는 결국 우리에게 다시 돌아온다. 우리는 다시 무엇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을 까? 영화 한편을 보고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다시 나를 무겁게 누르기만 한다. 그 무거움에서 헤어나지 못하지만 아직 문제의식을 모두 내던지고 이대로 내 욕구만을 좇으며 살아갈 순 없다는 여명 속 영화보기 자세만이 내겐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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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폐곡선을 그린다 (The Bird Who Stops In The Air, 1999) - 전수일

※ 오래전 작성하였으며 시의성이 떨어지는 영화이지만, 블로그 테스트 겸 포스팅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


 요즘 내 삶의 주제는 답답함이다. 25살. 대학교 3학년.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하는 고민에 난 아직 명확한 답을 못내리고 있다. 때이른 고민이라 자조해도 그 갑갑함은 멈추지 않는 것 같다. 내가 그동안 몸담은 여명 안에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역시 답답해져 간다. 과연 내가 그 영화에 대해 얼마나 충실히 읽어내고 말들을 토해 내는 것인지, 성찰없는 내 말들은 어색하게 내 주위를 맴돌고, 말을 하면 할 수록 내 안의 무엇이 텅비는 느낌이다. 과연 난 영화에 대해 진실한가?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같은 영화, 롱테이크와 그 속에서 풍부한 의미를 읽어낸다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각 프레임으로 해부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빠른 화면과 서스펜스의 내러티브를 쫓으며 재미를 추구하는 일에 익숙해져 버린 나를 지치게 하는 이 영화의 롱테이크 속에서 무언가를 잡아내려는 노력은 내게 선명한 영화의 이미지를 전달해 주지만, 영화를 보면 볼 수록 그것은 너무도 확연해 질 뿐, 텅빈 내안에서 여과되지 못하고 파랗게 침전한다.

"교수님은 자신이 진실하다고 믿으세요?”


 뭐가? 무엇에 진실해야 할 것인가? 영화를 가르치는 교수로서 영화에 대해, 학생에 대해, 그들과의 관계에 대해,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그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그리고 김상호 자신에 대해서까지 그가 말하는 영화속의 삶처럼 진실해야 한다고 강요하고 싶다. 상호가 사람들을 모순과 이기주의라는 자신의 수렁속으로 끌어들이는 모습을 발견한 나는 이런 강요의 근거를 찾는 서스펜스에 몰입한다. 하지만 과연 나는 김상호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가?
맨 처음 새는 영화 안에서 이상적인 이미지로 등장한다. <나쁜 피>에서, 새는 현실세계에서의 탈출, 인물의 비상과 도약을 표현하는 이미지이다. 그렇게 비상하려는 인간은 결국 죽음이라는 영원한 비상으로 환원된다는 상호의 해석은 학생들을 졸리게 할 뿐. 죽음으로 환원되는 듯 상호도 잠에 빠져든다. 상호가 잠을 자며 만나는 것은 새장같은 공간 속에서 새둥지를 부퉁켜 앉은 아이의 이미지다. 상호는 빚독촉에 시달리고 자신의 가정도 팽개치면서, 화장실에서의 배설 행위처럼 영희에 탐닉하지만 그것은 불쾌하다. 그가 ‘아!’하고 내뱉는 신음소리가 절정의 쾌락이 아닌 고통인 것처럼 말이다. 이어지는 일련의 에피소드들 - 술에 취한 채 최교수에게 데이트 신청하는 일, 바에서 만난 낯선 여자와 여관에 가는 일에서 알 수 있듯 그의 삶은 자기 만족과 쾌락을 맴도는 폐곡선을 그린다.


"넌 니 자신도 모르기 때문에 새나 쫓아다니는 거 아냐?”


졸업작품을 찍는 동안 상호는 학생들에게 대단한 권력을 지닌다. 학생들을 이끌고 회의를 하는 자리에서 상호는 수남의 이야기를 영화에 진솔하게 담으면 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열악한 영화 제작 현실에 묻혀버린다. 상호의 권위는 교수라는 껍데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것은 졸업작품의 뒷풀이에서 소외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무력할 뿐이다. 이것은 또 다른 학생들을 가르치고 졸업시키는 과정에서 반복될 것이다. “네가 말하는 책임감이 뭐니?” 그는 책임감이란 단어를 되뇌이며 술에 취한 모습으로 어두운 밤길을 걸어 나와, 영화를 보는 우리들을 향해 걸어오지만 화살표는 우리를 향하지 않는다. 꺾인 방향에서 아이가 걸어나와 구걸을 한다. 욕을 해대는 그 아이와 상호가 함께 담배를 피는 모습에서 우리는 어른과 아이라는 대비점보다는 둘 사이의 동질성을 느낀다. 무책임하게 영희를 버렸고,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에 몰두하는 일에도 지쳤다. 상호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그 아이를 매개로 하여 상호는 유년의 기억처럼 비현실속에 존재하는 새 둥지와 아이를 찾아 나선다.


“넌 정말로 사랑을 몰라.”





둘은 사랑했을까? 영희와 상호가 만나는 시퀀스는 상징으로 가득하다. 고장난 차의 모티브는 영희의 등장에서, 그리고 상호와 영희의 관계가 끝나는 장면에서 반복된다. 그 수미상관의 구조 안에서 줄곧 상호는 영희라는 욕망의 대상을 따라가는 것이다. 둘의 만남은 윤리적으로 불륜이며 상호가 영희의 집으로 가는 길은 시작부터 사기처럼 불운이 이어진다. 버스를 놓치고 프레임의 저 끝에서 걸어오는 영희를 기다려야하는 롱테이크의 답답한 시간은 상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전달된다. 그것을 지켜보는 이는 답답하다. 그렇게 때문일까? 상호는 여관에 영희를 남겨두고 홀로 떠난다. 그가 영희에게 남긴 것은 깊은 상처와 불행의 씨앗이다. 영희는 입덧을 하며 남겨진 자의 고통을 토해낸다. 영희가 홀로 밥을 먹으며 뱉어 낸 우유 또한 상호가 남긴 불쾌한 모든 것이다.
영희는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상호는 면도하다가 피를 보고야 만다. 영희와 상호가 함께 차를 타고 가는 불안한 길에서 둘은 무언가를 치어죽인다. 영희가 동물을 묻어주고 상호는 담담히 그것을 바라본다. “더이상 피곤하게 하지마!” 영희는 상호에게 결혼을 제안하지만 상호는 그녀를 붙잡지 못한다고 말한다. 사고난 차는 견인되어가고 그 방향으로 영희도 떠난다. 상호는 미련처럼 그녀를 붙잡지만 영희는 그를 뿌리치고 떠난다.




“교수님은 영화를 왜 하세요?”


 글쎄, 욕망 때문인가? 욕망의 대상 - 영희가 떠난 뒤부터 상호를 따라가는 카메라는 불안하게 흔들린다. 새의 형상을 들고 철길을 걸어가고 뚝방을 따라가는 인물과 그를 뒤쫓는 인물, 혹은 카메라. 우리는 두 사람중 누가 상호인지 알 수 없는 쇼트에서 상호의 분열된 자아를 발견한다. 상호가 영희에게 “나야”하고 전화하지만 영희는 샤워를 하며 상호를 씻어내린다. 불쾌한 냄새의 이구아나의 뒤를 잇는 쇼트는 새가 되려하는 상호의 이미지이다. 자신이 그린 허위적인 삶, 불륜과 쾌락의 지도를 따라오던 상호는 방향을 잃었다. 스스로 새가 되려 해도 그것은 투영된 어두운 그림자다. 새는 비상하려 하지만 현실은 거대한 새장처럼, 혹은 낚시줄처럼 비상하려는 자의 발을 옭아매고 진흙탕 속에서 몸부림 치게 한다.
다시 운암저수지. 노인이 걸어간 시간의 방향 반대편에서 상호가 걸어나온다. 그가 더 이상 새들도 찾지 않는 저수지를 무심히 보는 사이, 아이들이 뛰어나와 상호 옆에서 저수지를 향해 무심히 돌을 던진다. 그 아이들이 뛰어나간 저편에서 유년의 기억처럼 한 아이가 걸어온다. 둘은 무심히 스쳐지나가고 상호는 저편으로 멀어져간다. 이것은 유년의 기억을 넘어선 상호의 퇴행이다.


"사람사는게 항상 심각한 거 아니잖아요?"


 어떠한 의미에서든 영화속 현실은 허구이다. 진실하게 담으려 해도 그것은 재현된 허구로 존재한다. 그 리얼리티의 미학은 수남을 짓누르는 심각한 삶의 방식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영화 속에서 진실한 삶의 모습을 찾으려 하는 이유는 극단적인 심각함이나 단편적인 감동의 그래프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실천의 동기가 되고, 삶에 활력을 부여하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를 본다. 그렇게 '내가 살아 있어야' 영화를 볼 수 있다. 위험한 말이 될 지 몰라도, 아무런 성찰 없는 삶은 영화 앞에서도 진실치 못하다. 나는 어떠한가?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의 분석이 상호가 쫓는 새가 되지 않기 위해 항상 깨어 있고 싶다.

                                                 2003년, 5년 전 25살이었던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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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관계>,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 <스캔들>...

※ 오래된 글이자 시의성이 떨어지는 영화이지만, 블로그 테스트 겸 포스팅.

<위험한 관계 Dangerous Liaisons ; 스티븐 프리어즈>





 솔직히 <발몽>은 못봤다. 그리고 내가 읽은 라클로의 원작 <위험한 관계>의 분량 또한 얼마 되지 못할꺼다. 그 서간체 소설에 나오는 편지를 읽다 읽다 지쳐 잠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혹 알고 있는 것이 계속해서 리메이크 되는 스토리 뿐이라도 어떠한가. 스티븐 프리어즈의<위험한 관계>, 로저 컴플(솔직히 이 감독은 별 느낌이 와닿지 않는다)의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 그리고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 - 朝鮮男女相熱之事>를 봤을 뿐인데 난 왜 이러한 스토리에 집착착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 작은 감동으로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간단하다. 비슷한 스토리. 그것을 각 작품마다 녹여내는 솜씨는 다 다를지라도 한낱 관객을 뿐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영화들이 주는 감동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간직하기 위한 작업들뿐이기 때문에. 곧 잊혀지겠지만.......



<위험한 관계>,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 <스캔들>



 세 영화의 스토리는 동일하다. 다섯명의 중심인물의 역할은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복잡한 얘기 할것 없이 동일한 원작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ㅡ_ㅡ;;




:: 발몽 (존 말코비치) - 세바스찬 (라이언 필립) - 조원 (배용준)

:: 메르퇴이유 부인(글렌 클로즈) - 캐더린 (사라 미셀 갤러) - 조씨 부인 (이미숙)

:: 트루벨 부인 (미셜파이퍼) - 아네트 (리즈 위더스푼) - 숙부인 정씨 (전도연)

:: 당스니 (키아누 리브스) - 로날드 (?? 무슨 흑인배우) - 권인호 (?? 신인?)

:: 세실(우마 서먼;; KillBill이 기대된다.) - 세실(?? 별매력 없두만...) - 소옥




 발몽메르퇴이유 부인은 사촌지간이지만 사랑했던 관계. 둘은 각자를 이용한다. 트루벨 부인을 노리고 있던 발몽은 메르퇴이유 부인과 일종의 계약을 맺는다. 밀란 쿤데라가 쓴 <느림>에서 인용한 바에 따르면 '정복 게임'이라고 할까? 발몽은 쉬운 정복 상대인 세실에게 쾌락의 기술을 가르치면서 당스니와 연결시킨다. 그 사이 트루벨 부인에게도 작업 들어간다. (대단한 넘!ㅡ_ㅡ) 그녀의 정조를 무너뜨리면 메르퇴이유 부인에게서도 적절한 상(?)이 있을 것이기에.....



 그렇게 발몽은 트루벨 부인을 무너뜨리기를 진행하는 동안 조금씩 그녀에게 빠져든다. 단지 쉽게 정복하지 않고 결국 진심으로 그녀와 사랑을 나눈다. 이에 대한 질투심으로 메르퇴이유도 당스니와 쾌락을 즐긴다. 자신이 진정한 사랑에 빠져 있음을 의식하지 못한 발몽은 메르퇴이유에게 그 상(?)을 요구하고 그녀는 발몽의 명성(희대의 바람둥이라는..)을 자극하여 결국 발몽이 트루벨 부인을 버리게한다. 발몽은 쓰라린 마음으로 메르퇴이유에게 계약에 따른 상을 요구하지만 마음이 트루벨에게 가있는 발몽을 상대하지 않는다. 그가 트루벨을 진정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게 함으로서 발몽의 고통의 배가시킨다. 이에 질 발몽이 아니다. 그 역시 메르퇴이유가 지금 빠져 있는 당스니가 그녀를 버리고 세실에게 갔음을 알리며 메르퇴이유의 복잡한 남자관계에 혐오를 내비친다.



 둘 사이에 벌어지는 것은 쾌락적인 Sex가 아니라 전쟁. 메르퇴이유는 세실을 구실로 당스니와 발몽을 결투하도록 한다. 여기서 발몽은 검술까지 두루 갖춘 인물(근데 솔직히 배용준의 무술은 좀 오바 ㅡ_ㅡ;) 그가 당스니에게 질리는 없지만 그렇게 결투를 하는 동안 발몽은 자신이 진정으로 트루벨 부인을 사랑했음을 깨닫는다. 그 순간 당스니는 발몽을 죽게 한다. 죽어가는 발몽은 자신이 메르퇴이유의 계략에 빠져 진정한 사랑 트루벨 부인에게 깊은 상처를 줬음을 후회하고, 죽음을 통해 속죄한다. 그의 죽음에 메르퇴이유 또한 미친듯이 슬퍼하지만, 발몽이 죽으며 전하는 그간의 기록에 의해 메르퇴이유 부인 또한 파멸하게 된다. (헉헉....... ㅡ_ㅡ 의외로 복잡한 스토리인가?)





무엇보다 압권은, 발몽이 트루벨 부인을 버리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먼저 보았던 <위험한 관계>의 존 말코비치의 눈빛이 무엇이었기에 <스캔들>의 배용준이 내뱉는 대사, "어쩔수 없는 일이오." 를 듣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단 말인가? 그리고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의 라이언 필립의 대사 또한 그렇게 가벼워 보인단 말인가? 각 작품을 비교하긴 싫지만 개인적으로 <위험한 관계> 전달하는 그 무엇이 훨씬 더 묵직하게 느껴졌음은 나로서도 '어쩔수 없는 일이다.' - "It's beyond my control...."



 관계의 구조. 유혹의 게임에서 고통은 메르퇴이유 부인-> 발몽 -> 트루벨 부인에게 전달되고, 이의 반작용은 진정한 사랑이란 결말에서 트루벨 부인 -> 발몽 -> 메르퇴이유 부인에게 전해진다. 발몽의 죽음을 통해 발견되는 진정한 사랑에 대한 희비가 교차하는 구조. 그것이 이 스토리의 핵심이다. (물론 각색하기 나름이지만.) 발몽을 따라 트루벨 부인이 죽으면 (and <스캔들>) 진정한 사랑에 바치는 비극이 되고, 트루벨이 죽지 않으면 메르퇴이유 부인의 사회적 파멸을 쟁취하는 그녀의 승리가 된다.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 이때엔 비극이 좀 무뎌진다 할까?



 물론 리메이크 되는 시대의 컨텍스트와 캐스팅 자체에서 오는 무게감의 차이에 의해 각 영화가 전개한 스토리는 정당화 될수 있다.



 자 보라! 존 말코비치, 글렌 클로즈, 미셜 파이퍼, 키아누 리브스, 우마 서먼.... 이 화려한 캐스팅에도 불구하고 (물론 80년대 후반의 상황에선 화려한 캐스팅이 아니었을 수도 있따. ㅡ_ㅡ:) 배우들은 누구하나 제 역할에 못미치지 않고 있지 않은가? 특히나 존 말코비치의 묘한 눈빛 연기가 전해오는 감동은 그 영화를 처음 접해본 사람이면 안다. (존 말코비치는 알고보면 사시라한다.


사시의 눈빛 연기라?? ㅡ,ㅡa)





 같은 역할 배용준의 눈빛이 웬지 느끼하고 비교적 가볍게 느껴지는 까닭은 <스캔들>이 한국영화의 흥행 구조상 코미디를 섞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웃음의 잔재를 뒤집어 쓰고 있기 때문이며, 라이언 필립이 존말코비치처럼 무게감이 있지 않아보이는 까닭은 리즈 위더스푼(캐더린)에 좀더 비중을 싣기 위함이라고 하자. 둘은 실제 연인 관계이기에, 관객에게 실제 관계를 재현한다는 환상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연인인 두사람 누구의 무게도 소홀히 할수 없기 때문인지, 혹은 그렇기에 라이언과 리즈가 모두 죽는 비극으로 끝나서는 안되는 것인지 알수 없다. 암튼 리즈 위더스푼은 죽지 않는다. 나머지 두 영화와 비교되는 부분이다.


 그래도 둘이 모두 죽는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 좀더 큰 감동을 전해다 줄것이다. 메르퇴이유 부인의 사회적 파멸이 단지 트루벨 부인의 실제적인 승리로 수렴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트루벨 부인이 살아 있어서는 '비극적인 진정한 사랑'이라는 모티브는 파괴된다.


 머...... 각 영화가 노리는 효과가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 각색의 차이라고 해 두자. 어느 영화를 좋아할 것인지 그건 관객 각자가 느낄 만족감에 달린 것이니까. 난 <위험한 관계>에 비중을 두었을 뿐이다.




 군대가기 전인가? 아마도 99년에 공중파를 통해 처음으로 <위험한 관계>라는 영화를 접했으니, 내가 본것은 10여년이 지난 후, 유명해진 사람들의 과거 젊은 모습을 통해 전해오는 감동인 것이다. 그렇게 각인된 감동에 의해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이나 <스캔들>이란 영화 자체가 지닌 또 다른 포인트를 놓치게 된건 아닌가 걱정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감히 10대의 우마 서먼이 연기하는 세실의 발랄하고 철없는 섹시함은  나머지 두 영화의 배우들에 비할바 없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
 아! 그리고 모든 영화를 통해 궁금했던 점인데, 세실은???? 도대체 메르퇴이유 부인의 사회적 파멸처럼 까발려 졌을 세실은 도대체 어떤 결말을 맞이한 것이야? 원작을 열심히!! 꾸준히 읽는 수밖에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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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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