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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3. 10.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 (The Bird Who Stops In The Air, 1999) - 전수일

오전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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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 작성하였으며 시의성이 떨어지는 영화이지만, 블로그 테스트 겸 포스팅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


 요즘 내 삶의 주제는 답답함이다. 25살. 대학교 3학년.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하는 고민에 난 아직 명확한 답을 못내리고 있다. 때이른 고민이라 자조해도 그 갑갑함은 멈추지 않는 것 같다. 내가 그동안 몸담은 여명 안에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역시 답답해져 간다. 과연 내가 그 영화에 대해 얼마나 충실히 읽어내고 말들을 토해 내는 것인지, 성찰없는 내 말들은 어색하게 내 주위를 맴돌고, 말을 하면 할 수록 내 안의 무엇이 텅비는 느낌이다. 과연 난 영화에 대해 진실한가?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같은 영화, 롱테이크와 그 속에서 풍부한 의미를 읽어낸다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각 프레임으로 해부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빠른 화면과 서스펜스의 내러티브를 쫓으며 재미를 추구하는 일에 익숙해져 버린 나를 지치게 하는 이 영화의 롱테이크 속에서 무언가를 잡아내려는 노력은 내게 선명한 영화의 이미지를 전달해 주지만, 영화를 보면 볼 수록 그것은 너무도 확연해 질 뿐, 텅빈 내안에서 여과되지 못하고 파랗게 침전한다.

"교수님은 자신이 진실하다고 믿으세요?”


 뭐가? 무엇에 진실해야 할 것인가? 영화를 가르치는 교수로서 영화에 대해, 학생에 대해, 그들과의 관계에 대해,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그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그리고 김상호 자신에 대해서까지 그가 말하는 영화속의 삶처럼 진실해야 한다고 강요하고 싶다. 상호가 사람들을 모순과 이기주의라는 자신의 수렁속으로 끌어들이는 모습을 발견한 나는 이런 강요의 근거를 찾는 서스펜스에 몰입한다. 하지만 과연 나는 김상호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가?
맨 처음 새는 영화 안에서 이상적인 이미지로 등장한다. <나쁜 피>에서, 새는 현실세계에서의 탈출, 인물의 비상과 도약을 표현하는 이미지이다. 그렇게 비상하려는 인간은 결국 죽음이라는 영원한 비상으로 환원된다는 상호의 해석은 학생들을 졸리게 할 뿐. 죽음으로 환원되는 듯 상호도 잠에 빠져든다. 상호가 잠을 자며 만나는 것은 새장같은 공간 속에서 새둥지를 부퉁켜 앉은 아이의 이미지다. 상호는 빚독촉에 시달리고 자신의 가정도 팽개치면서, 화장실에서의 배설 행위처럼 영희에 탐닉하지만 그것은 불쾌하다. 그가 ‘아!’하고 내뱉는 신음소리가 절정의 쾌락이 아닌 고통인 것처럼 말이다. 이어지는 일련의 에피소드들 - 술에 취한 채 최교수에게 데이트 신청하는 일, 바에서 만난 낯선 여자와 여관에 가는 일에서 알 수 있듯 그의 삶은 자기 만족과 쾌락을 맴도는 폐곡선을 그린다.


"넌 니 자신도 모르기 때문에 새나 쫓아다니는 거 아냐?”


졸업작품을 찍는 동안 상호는 학생들에게 대단한 권력을 지닌다. 학생들을 이끌고 회의를 하는 자리에서 상호는 수남의 이야기를 영화에 진솔하게 담으면 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열악한 영화 제작 현실에 묻혀버린다. 상호의 권위는 교수라는 껍데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것은 졸업작품의 뒷풀이에서 소외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무력할 뿐이다. 이것은 또 다른 학생들을 가르치고 졸업시키는 과정에서 반복될 것이다. “네가 말하는 책임감이 뭐니?” 그는 책임감이란 단어를 되뇌이며 술에 취한 모습으로 어두운 밤길을 걸어 나와, 영화를 보는 우리들을 향해 걸어오지만 화살표는 우리를 향하지 않는다. 꺾인 방향에서 아이가 걸어나와 구걸을 한다. 욕을 해대는 그 아이와 상호가 함께 담배를 피는 모습에서 우리는 어른과 아이라는 대비점보다는 둘 사이의 동질성을 느낀다. 무책임하게 영희를 버렸고,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에 몰두하는 일에도 지쳤다. 상호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그 아이를 매개로 하여 상호는 유년의 기억처럼 비현실속에 존재하는 새 둥지와 아이를 찾아 나선다.


“넌 정말로 사랑을 몰라.”





둘은 사랑했을까? 영희와 상호가 만나는 시퀀스는 상징으로 가득하다. 고장난 차의 모티브는 영희의 등장에서, 그리고 상호와 영희의 관계가 끝나는 장면에서 반복된다. 그 수미상관의 구조 안에서 줄곧 상호는 영희라는 욕망의 대상을 따라가는 것이다. 둘의 만남은 윤리적으로 불륜이며 상호가 영희의 집으로 가는 길은 시작부터 사기처럼 불운이 이어진다. 버스를 놓치고 프레임의 저 끝에서 걸어오는 영희를 기다려야하는 롱테이크의 답답한 시간은 상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전달된다. 그것을 지켜보는 이는 답답하다. 그렇게 때문일까? 상호는 여관에 영희를 남겨두고 홀로 떠난다. 그가 영희에게 남긴 것은 깊은 상처와 불행의 씨앗이다. 영희는 입덧을 하며 남겨진 자의 고통을 토해낸다. 영희가 홀로 밥을 먹으며 뱉어 낸 우유 또한 상호가 남긴 불쾌한 모든 것이다.
영희는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상호는 면도하다가 피를 보고야 만다. 영희와 상호가 함께 차를 타고 가는 불안한 길에서 둘은 무언가를 치어죽인다. 영희가 동물을 묻어주고 상호는 담담히 그것을 바라본다. “더이상 피곤하게 하지마!” 영희는 상호에게 결혼을 제안하지만 상호는 그녀를 붙잡지 못한다고 말한다. 사고난 차는 견인되어가고 그 방향으로 영희도 떠난다. 상호는 미련처럼 그녀를 붙잡지만 영희는 그를 뿌리치고 떠난다.




“교수님은 영화를 왜 하세요?”


 글쎄, 욕망 때문인가? 욕망의 대상 - 영희가 떠난 뒤부터 상호를 따라가는 카메라는 불안하게 흔들린다. 새의 형상을 들고 철길을 걸어가고 뚝방을 따라가는 인물과 그를 뒤쫓는 인물, 혹은 카메라. 우리는 두 사람중 누가 상호인지 알 수 없는 쇼트에서 상호의 분열된 자아를 발견한다. 상호가 영희에게 “나야”하고 전화하지만 영희는 샤워를 하며 상호를 씻어내린다. 불쾌한 냄새의 이구아나의 뒤를 잇는 쇼트는 새가 되려하는 상호의 이미지이다. 자신이 그린 허위적인 삶, 불륜과 쾌락의 지도를 따라오던 상호는 방향을 잃었다. 스스로 새가 되려 해도 그것은 투영된 어두운 그림자다. 새는 비상하려 하지만 현실은 거대한 새장처럼, 혹은 낚시줄처럼 비상하려는 자의 발을 옭아매고 진흙탕 속에서 몸부림 치게 한다.
다시 운암저수지. 노인이 걸어간 시간의 방향 반대편에서 상호가 걸어나온다. 그가 더 이상 새들도 찾지 않는 저수지를 무심히 보는 사이, 아이들이 뛰어나와 상호 옆에서 저수지를 향해 무심히 돌을 던진다. 그 아이들이 뛰어나간 저편에서 유년의 기억처럼 한 아이가 걸어온다. 둘은 무심히 스쳐지나가고 상호는 저편으로 멀어져간다. 이것은 유년의 기억을 넘어선 상호의 퇴행이다.


"사람사는게 항상 심각한 거 아니잖아요?"


 어떠한 의미에서든 영화속 현실은 허구이다. 진실하게 담으려 해도 그것은 재현된 허구로 존재한다. 그 리얼리티의 미학은 수남을 짓누르는 심각한 삶의 방식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영화 속에서 진실한 삶의 모습을 찾으려 하는 이유는 극단적인 심각함이나 단편적인 감동의 그래프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실천의 동기가 되고, 삶에 활력을 부여하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를 본다. 그렇게 '내가 살아 있어야' 영화를 볼 수 있다. 위험한 말이 될 지 몰라도, 아무런 성찰 없는 삶은 영화 앞에서도 진실치 못하다. 나는 어떠한가?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의 분석이 상호가 쫓는 새가 되지 않기 위해 항상 깨어 있고 싶다.

                                                 2003년, 5년 전 25살이었던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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