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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3. 10.

분노의 저격자 (Blood Simple, 1984) - 조엘 코엔

오전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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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량한 텍사스, 음산한 밤을 달리는 자동차. 내가 아는 건 텍사스고 여기서 너는 너야 라고 말하는 Narration처럼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누아르라는 장르보다 단지 이란 개별 영화이고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 영화에 관한 것뿐이라는 옹졸한 변명으로 여명 속 영화보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는 것은 없다. 하지만 항상 여명 속 영화보기가 내게 던져주었던 성찰에 대한 진지한 물음과 그 자세가 아직 남아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참고: 필자는 휴가중인 육군병장...)
 무엇이 우습지?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마티, 레이, 에비. 사건의 당사자들도, 이들 세 사람의 삼각 구도로 결정되는 사건의 내부에 있는 사람(사설탐정)도, 외부에 있는 사람(모리스)도 자신들이 보고 싶어하는 사건의 단면들만을 인식한 채 사건에 엮여 있다. 불안 속에 단절된 듯 엉켜있는 상황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일까? 관객은 모든 것을 보지만 정말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관객에게는 명확하기만 한 사건의 단서들에 갇혀있는 그들을 보며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결국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은 무엇인가? 난 아직도 이 영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에비 vs 레이 : "알고 싶지도 않소. 하지만 당신을 좋아하오."
 에비의 불안은 사건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녀 남편과의 문제의 근본 원인이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진 않지만 그것이 해결을 위해 사건에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레이에게 중요한 건 그녀가 떠안고 있던 문제가 아니니까. 그에게 당장 중요한건 그 문제에 의해 파생된 결과, 그녀의 불안 속에 그의 마음이 받아들여 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만남이 이해를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조건의 결합만을 필요로 한다.
인물들 각자가 처한 상황만이 의미를 갖고 불륜과 살인, 돈이 얽힌 치정극 속으로 얽혀 들어간다. 사건의 시작부터 이미 모든 가능성은 뻔하게만 보이는 듯하지만 영화는 무겁기만 하다. 이 영화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레이 vs 마티 : "너따위와 얘기하고 싶지 않아."

 마티의 외도가 항상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말들과 함께 마티의 불안은 이미 에비의 외도를 의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티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이다. 아내가 떠나가도 버릴 수 없는 건 가게 주인이라는 자신의 존재가 움켜쥐고 있는 힘이다. 에비와 레이의 관계를 알고도 분노하지 않는 마티를 볼 땐 당황스럽다. 이젠 자신의 아내에 대한 무엇도 주장할 수 없을 만큼 가정, 부부라는 가치도 힘을 잃은 것일까. 마티가 분노를 느끼는 건 에비의 상대가 레이라는 것에 있다기 보다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에도 무력하기만 한 자기 자신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마티는 그의 힘을 행사하던 방식대로 사설탐정을 이용하려 한다. 하지만 남은 건 어리석과 비참한 죽음이다. 차라리 그리스 전령의 목을 베는 것처럼 에비와 레이를 죽이고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이 희망적이다. 삶의 조건과 자신의 힘을 포기할 만큼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그것을 더욱 사랑하니까.

 마티 vs 에비 :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에비는 항상 두렵다. 마티가 묻든 레이가 묻든 항상 나도 당신을 사랑한다 대답하는 그녀의 말은 어느 쪽도 믿기 힘들다. 처음부터 인물들 간의 단절은 거역할 수 없는 현실이었으니... 이 영화는 그렇게 희망적일 수 없어서 이제야 막 진심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레이를 죽이고 만 것일까? 진실한 사랑이라는 대안도 부부라는 가치관을 무너뜨리는 한 옳지 않다. 영화는 제일 먼저 마티를 죽이고도 항상 그의 죽음을 가려져 있게 함으로써 에비의 마티를 향한 두려움도 영원히 해결될 수 없도록 조건 지워 놓았다. 마티에 대한 꿈과 단서들의 반복처럼 마티의 존재는 항상 에비의 주변을 떠돈다. 가치관의 상실, 그것은 불안으로 변모하여 우리를 따라다니리라.

 사설탐정 : "내말은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니 당신도 짐작했을 거요."

 사설탐정의 Narration은 영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사건의 삼각구도에서 모든 관계를 매개하는 인물의 Narration과 웃음이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데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인물들의 개개의 욕구 - 레이의 애정에 대한 욕구, 에비의 도피의 욕구, 마티의 돈에 대한 욕구들이 뒤엉켜 사건은 어느새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뫼비우스의 고리처럼 발전하는데, 마티에게 총을 쏘고 순간 한 면을 꼬아버린 존재가 바로 사설탐정이다. 사건의 시작과 끝의 경계는 애매모호하다. 무엇도 명확하지 않은 세상에 부조리란 항상 있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욕구를 향하는 인물들이 처한 세계의 불합리성을 대변하며, 죽는 순간에도 웃을 수 있다. 그의 목은 잘린 뒤에도 기어다니며 사람들 주위를 항상 맴돌 것이다. 그는 카뮈가 되어 관객인 우리를 비웃는다.

 "세상은 불만자로 가득해.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나는 그 Narration을 통해 이 영화는 본질적으로 부조리에 관해 의문을 던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리스처럼 우리는 살인을 직시하지도 않고 돈 문제에도 관여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어차피 사건의 바깥에 있으니까. 두려움을 막 벗어났다는 착각을 하는 에비를 비웃는 그의 목소리가 영화 바깥의 우리에게도 들린다. 살아남은 자에 대한 조롱은 그렇게 관객에게 넘어오는 것이다. 그대, 당신들은 또 어떤 문제를 직하지 못한채 지금 어디서 맴돌고 있느냐 하면서...
영화 속 사건의 명백한 단서들을 보면서 영화를 재미있다고만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진실은 항상 저 바깥에 있으니까. 사설탐정의 웃음이 어울리지 않는 상황처럼 어차피 진실은 우리가 그렇다고 믿고 싶어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자들의 냉소는 결국 우리에게 다시 돌아온다. 우리는 다시 무엇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을 까? 영화 한편을 보고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다시 나를 무겁게 누르기만 한다. 그 무거움에서 헤어나지 못하지만 아직 문제의식을 모두 내던지고 이대로 내 욕구만을 좇으며 살아갈 순 없다는 여명 속 영화보기 자세만이 내겐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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