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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 27.

어떻게 하면 합리적인 보험에 가입할 수 있을까?



※ 물론 저는 보험상품을 판매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판매자이자 소비자로서의 경험을 가볍고 재미있게 쓰되

그 고민의 가치는 결코 가볍지 않은 글로 채워가는

블로그를 운영하고자 합니다.


(사실, 오늘 갑자기 아하! 하고 떠올려 쓰기 시작하는 글입니다.)


시작하기에 앞서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보험설계사도 고객을 골라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꼭 고객에 여유가 있어서도 아니고, 뭔 멤버쉽 보험설계사냐? 이런것도 아닙니다.


(제가 외국인 고객을 만났다는 의미의 사진이 아닙니다 ;;)


지금까지 만나뵌 고객분들을 천천히 돌이켜 보면

청약서 내밀었을때 쉽게쉽게 싸인해주는 사람이 반드시 좋은 고객분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사소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따지면서 힘들게 했던 고객분은

단지 까다로운 사람일 뿐 나쁜 고객이셨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고객의 성격이나 성향이 훌륭한 고객을 결정 짓는 요소일까요?

고객이 지불하는 돈의 크기가 클 수록 훌륭한 고객일까요?


제가 생각하는 '훌륭한 고객'은 누구나 되실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훌륭한 고객이란


본인이 구매한 상품의 효용가치를 충분히 알고 있는 사람


입니다. 정말, 정말로 그렇습니다.


(니가 시방 뭔 상술을 시전하려는 겨? 라고 생각하실수 도 있습니다만....
정말로! 그렇습니다.)


보험이 꼭 필요해서 가입하는 분도 계십니다.

보험이 별로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데 보험설계사의 설득으로 가입한 분도 계시죠.


수많은 가입 경로와 관계없이

결과적으로 본인이 가입한 상품에 대한 충분한 가치를 알고

그에 대한 합당한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면

'훌륭한 고객'이 되신 겁니다.

( 당신이 훌륭한 고객인가 아닌가?를 생각하고 있다면 ... 낚... 낚인겁니다... )



안타깝지만 보험상품의 기본적인 특징을 모르고서

'훌륭한 고객'이 되실 수는 없습니다.

'훌륭한 고객'이 되실려면 기본적인 것은 알고 계셔야 합니다.




 "보험은 ①미래②예측할 수 없는 재난이나 사고의 위험에 대비하여

③미리 돈을 내고 보장을 받는 상품입니다.

보험은 다른 금융상품에 비하여 그 구조가 매우 복잡하고 까다로우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고를 대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확실성

높고, 가입기간도 짧게는 수년에서 길게는 수십년까지 ⓑ장기간 유지되는 상품입니다.

보험에 적절하게 가입한다면 질병과 사망, 노후 등 미래의 위험에

대비하는 좋은 안전장치가 되지만, 계획성 없이 가입했다가는 오히려

경제적인 손실만 가져오는 애물단지가 될수도 있습니다."

(※ " " 표시부분은 금감원「보험상품 현명하게 가입하기」핸드북 자료 인용  )



① 과 ② 는 결국 ⓐ불확실성을 의미하지만 ③과 ⓑ라는 속성은

보험의 한계와 그에 따른 효용을 명확히 드러냅니다.

여기서 그 한계란, 보험이 사고 자체를 막아주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너무 이상적인가요? ㅎㅎㅎ)

보험은 사고로 인해 발생하는 경제적 손실에 대한 대비책일 뿐입니다.

경제적 손실/보상이란 바로 과 직결된 문제라는 것입니다.


보험이 저축과 달리 미래의 커다란 위험에 대한 효과적인 대비책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위험에 대한 지불하여야 할 경제적 부담을 분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보험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자 효용인데

이 효용을 판단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또 추가로 다뤄보겠습니다.)



하지만 보험은 돈을 미리내고 있거나 이미 낸 사람들(보험가입자)만이 혜택을 받습니다.

저축은 당장 그 돈이 모아지기 전에는 대비책이 될 수 없는 반면

보험은 가입한 순간부터 그 혜택이 주어집니다.

(보험 vs 저축의 장단점 및 재무설계도 추후에 다뤄 보겠습니다. ㅠ_ㅜ)


(계속 돈이 들어갑니다..... 한번 사고 마는 상품이 아닌 '유지'해야하는 '계약'이기 때문)


때문에 보험이라는 상품이 실제 삶에서 가장 크게 다가오는 부분은

ⓑ장기간 유지되는(유지해야 하는)상품이라는 속성일 것입니다.

보험이라는 상품은 유지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랜 기간을 유지한다고 생각할 때의 총 비용을 생각하면 만만찮은 돈입니다.

잘 모른다고 해서 짧은 고민으로 선택할 상품이 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눈 크게 뜨고, 잘 알아보고 가입해야 하는 상품입니다. 물론 머리는 아픕니다.)


보험의 가치와 효용, 충분히 느끼고 계십니까?

가입하고도 잘 모르는 보험, 만족하고 계십니까?

곧 가입하려는 보험, 당신은 지금 훌륭한 고객입니까?


블로그를 방문한 분들께서 정말 훌륭한 고객이 되실 수 있는 방법에 관한

많은 고민과 그 해답을 천천히 끄적여 나가 보겠습니다.



2012. 3. 10.

질투는 나의 힘 (Jealousy Is My Middle Name, 2002) - 박찬옥





"어차피 게임이 안되요. 전에도 그랬어요."
 반복. 게임은 계속되는 것인가? 일상의 단면으로서의 반복은 영화 곳곳에 깔린다. 원상은 내경을 버리고 그녀를 채갔던 윤식(편집장)밑에서 일을 한다. 그러한 원상의 심리는 묘한 곳이 있다. 여자를 사이에 둔 원상과 윤식의 삼각관계는 성연을 통해 반복된다. 하지만 결과는 같다. 마누라한테도 잘하고 애인에게도 잘하면 된다는 식으로 유부남의 로맨스를 추구하는 윤식과, 애인도 지키지 못했고 성연도 잡지 못한 원상이 벌이는 삼각관계의 틀에 정말이지 역전은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질투는 연적에게 느끼는 감정이 아닌 자신이 갖지 못한 모든 것에서 비롯하는 무엇인 마냥 그것의 승리는 애당초 의미가 없었다. 둘 사이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닮아갈수록 로맨스는 한낱 게임에 불과한 것이 된다. 두 여자를 사이에둔 감정, 이미 가진자를 바라보는 못가진 자의 질투는 단지 공유된 경험으로 전락하고 그것의 무게는 일상의 차원에서 가벼움으로 침전한다. 단지 그것은 어차피 안될 '게임'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인간감정은 묘하게 전이되는 속성을 지닌다. 내경도 잃었고 성연에게 애걸하던 일도 헛일이었다. 성연에 대한 마음을 접은 순간 그것은 하숙집 딸에게 향한다. 욕망에 의해 매개되는 관계에 로맨스가 어디 있단 말인가? 빈껍데기 사랑에 삶을 바쳐야할 책임감 혹은 의무감 따위는 간단한 문제다. 윤식의 충고를 듣고 원상은 그녀를 버린다. 그렇게 윤식이 추구하는 빈껍데기 로맨스의 길을 원상도 걸어가는 것이다. 관객은 일상의 차원에서 반복된 관계의 양상, 혹은 그것을 좆던 카메라 논리를 통해 윤식의 딸과 원상 사이에 벌어지게 될 일들을 암시받는다.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남은 건 우리의 일상에서 욕망에 덧씌워진 로맨스라는 하찮은 포장을 발견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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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미친 짓이다 (Crazy Marriage, 2001) - 유하




결혼의 현실과 연애의 이상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인가?

준영
은 결혼에 회의하고, 연희는 물질적 안정과 사랑이라고 하는, 양립하기엔 너무 큰 욕심을 함께 성취하려한다. 어차피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사람이 다른 한사람을 만난다고 하는 것은 확률적으로 우연에 불과하다. 준영에게는 예쁜KFC점원과 언제 올지 모르게 기다리게 하는 연희 둘 중의 선택. 연희에게는 똑같이 한겨레 신문을 말아쥔 두 남자 가운데 한사람. 선택은 그다지 운명적이지 않다.


만남. 둘은 늘 그래온것처럼 증명사진의 웃음을 띠고 몇살? 가족관계. 상투적인 대화를 나누고 상투적인 맞선의 코스를 밟아간다. (개인적으로 이성을 만날때 영화를 보는 것은 상대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속마음의 표현이라 생각한다. 함께 영화를 보고 있지만 그것은 영화와의 데이트다.) 버스를 놓치고, 못마신다던 술에 진탕 취한 둘은 '택시비나 여관비'나 똑같지 않느냐는 완곡한 대화를 통해 서로의 욕망을 실현한다. 둘은 옷을 벗지 않고 성급히(?) sex에 임한다.


"왜 옷을 다 벗지 않지?"

"옷을 다 벗으면 고깃덩어리 같아. 토할거 같애"




욕망의 실현을 위해 완곡한 대화를 나누는 것 처럼. 완전히 까발려진 사랑은 아름답지 않다. 현실은 물질적인 세계에 얽매여 있고 사랑이란 이상은 그것에 덧붙여진 포장처럼 존재한다. 결혼또한 그러한 것이 아닌가? 30여년을 서로 다른 사람으로 지내온 사람이 나머지 반평생 이상의 삶을 함께 하기 위해서 취해야할 배려는 질실보다는 위선이라 말한다. 인간은 어차피 자유로운 존재. 그런데 어떻게 일부일처제라는 욕망의 억압기제를 받아 들일수 있는가? 영원, 혹은 이상적인 사랑이라는 '로맨스의 세계'가 파괴된 듯한 세상에. 사랑의 결과로서 기능해야할 결혼은 이미 그 자체가 억압으로 다가온다.



 

"왜 결혼하려 하지 않아?"
"거짓말하고 살아갈 자신없어."

둘은 간간이 만남을 가진다. 그것은 일상적인 연애를 둘러싼 환상을 파괴하는 형식을 취한다. 솔직하고 진솔한 대화 속엔 결혼에 대한 준영의 회의 또는 두려움이 녹아 있고 연희의 조건, 혹은 사랑 사이의 갈등이 묻어난다.


"날 잡아" .... "아니 그 사람과 결혼할 날을 잡으라고."




선택. 연희는 준영을 떠보지만 준영은 결혼할 마음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연희는 의사 직업을 가진 안정적인 상대와의 결혼 준비를 시작한다. 둘만의 신혼여행에 이르기까지 과정. 거기엔 어쩌면 준영은 연희를 사랑한다는 가정, 연희에게 조건보다 사랑이 더 중요한 것이었다는 상상을 가능케 한다. 연희는 준영과 함께 다른 사람과의 결혼 준비를 함께한다. 연희가 살게 될 안락한 집에서 준영이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 로맨스 영화가 취하는 일반적인 어긋남에 여운을 남기기 위한 플롯의 전개는 둘만의 신혼여행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민박집에서 할머니와 민박 비용을 흥정하는 소박한 모습을 보이는 연희. 아까의 안락한 집과 상반되는 곳. 그곳에서 연희는 더이상 고깃덩어리가 아닌 육체로 준영에게 다가온다. 영화는 이렇게 둘 사이를 비극적인 결말로 매듭지을 만큼 도덕적이지 않다. 그리고 연희의 결혼. 준영은 연희의 결혼 생활을 상상하며 기다린다. 그것은 기다리는 것이다.

연희가 새로운 직장(?)에서 무료함을 느낄 때쯤인가? 연희는 준영을 찾아온다. 둘은 둘만의 공간을 꾸민다. 마치 주말부부처럼 그들만의 신혼여행에 이어 늦은 신혼은 시작된다. 하지만 점차 아름답지만 현실에서 절대 거세될 수 없는 조건이 그 정체를 드러낸다. 친구는 과거의 여자를 잊지못해 결혼생활과 과거 모두에 파경을 맞이한다.


"
이번기회에 완전히 헤어지는게 어때?"


무엇에 대해 헤어진다는 것인가? 둘의 미래는 준영의 중의적인 대사와 연희의 모순적인 태도에 의해 관객이 투영하고 싶은 대로 펼쳐질 것이라는 플롯의 구조를 취함으로서 열린 결말, 혹은 계속될 불륜의 여운을 남긴다.


영화는 결혼, 혹은 사랑의 의미에 관해 묻는다.

로맨스라는 포장이 제거된 준영과 연희의 관계는 냉소적인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한다. 분명한 캐릭터와 상황의 설정으로 단지 불륜이라는 모럴해저드를 상상적으로 소비하고 싶은 관객의 기호에 맞춰진 영화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플롯과 대사의 전개에서 중의적이고 이중적인 요소들을 엮고, 그 여백을 남기는 미학은 실제 영화의 가치 이상이다.

(혹시) 보면 볼수록 더 많은 것을 던져줄지도 모르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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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저격자 (Blood Simple, 1984) - 조엘 코엔




 황량한 텍사스, 음산한 밤을 달리는 자동차. 내가 아는 건 텍사스고 여기서 너는 너야 라고 말하는 Narration처럼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누아르라는 장르보다 단지 이란 개별 영화이고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 영화에 관한 것뿐이라는 옹졸한 변명으로 여명 속 영화보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는 것은 없다. 하지만 항상 여명 속 영화보기가 내게 던져주었던 성찰에 대한 진지한 물음과 그 자세가 아직 남아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참고: 필자는 휴가중인 육군병장...)
 무엇이 우습지?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마티, 레이, 에비. 사건의 당사자들도, 이들 세 사람의 삼각 구도로 결정되는 사건의 내부에 있는 사람(사설탐정)도, 외부에 있는 사람(모리스)도 자신들이 보고 싶어하는 사건의 단면들만을 인식한 채 사건에 엮여 있다. 불안 속에 단절된 듯 엉켜있는 상황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일까? 관객은 모든 것을 보지만 정말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관객에게는 명확하기만 한 사건의 단서들에 갇혀있는 그들을 보며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결국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은 무엇인가? 난 아직도 이 영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에비 vs 레이 : "알고 싶지도 않소. 하지만 당신을 좋아하오."
 에비의 불안은 사건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녀 남편과의 문제의 근본 원인이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진 않지만 그것이 해결을 위해 사건에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레이에게 중요한 건 그녀가 떠안고 있던 문제가 아니니까. 그에게 당장 중요한건 그 문제에 의해 파생된 결과, 그녀의 불안 속에 그의 마음이 받아들여 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만남이 이해를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조건의 결합만을 필요로 한다.
인물들 각자가 처한 상황만이 의미를 갖고 불륜과 살인, 돈이 얽힌 치정극 속으로 얽혀 들어간다. 사건의 시작부터 이미 모든 가능성은 뻔하게만 보이는 듯하지만 영화는 무겁기만 하다. 이 영화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레이 vs 마티 : "너따위와 얘기하고 싶지 않아."

 마티의 외도가 항상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말들과 함께 마티의 불안은 이미 에비의 외도를 의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티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이다. 아내가 떠나가도 버릴 수 없는 건 가게 주인이라는 자신의 존재가 움켜쥐고 있는 힘이다. 에비와 레이의 관계를 알고도 분노하지 않는 마티를 볼 땐 당황스럽다. 이젠 자신의 아내에 대한 무엇도 주장할 수 없을 만큼 가정, 부부라는 가치도 힘을 잃은 것일까. 마티가 분노를 느끼는 건 에비의 상대가 레이라는 것에 있다기 보다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에도 무력하기만 한 자기 자신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마티는 그의 힘을 행사하던 방식대로 사설탐정을 이용하려 한다. 하지만 남은 건 어리석과 비참한 죽음이다. 차라리 그리스 전령의 목을 베는 것처럼 에비와 레이를 죽이고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이 희망적이다. 삶의 조건과 자신의 힘을 포기할 만큼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그것을 더욱 사랑하니까.

 마티 vs 에비 :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에비는 항상 두렵다. 마티가 묻든 레이가 묻든 항상 나도 당신을 사랑한다 대답하는 그녀의 말은 어느 쪽도 믿기 힘들다. 처음부터 인물들 간의 단절은 거역할 수 없는 현실이었으니... 이 영화는 그렇게 희망적일 수 없어서 이제야 막 진심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레이를 죽이고 만 것일까? 진실한 사랑이라는 대안도 부부라는 가치관을 무너뜨리는 한 옳지 않다. 영화는 제일 먼저 마티를 죽이고도 항상 그의 죽음을 가려져 있게 함으로써 에비의 마티를 향한 두려움도 영원히 해결될 수 없도록 조건 지워 놓았다. 마티에 대한 꿈과 단서들의 반복처럼 마티의 존재는 항상 에비의 주변을 떠돈다. 가치관의 상실, 그것은 불안으로 변모하여 우리를 따라다니리라.

 사설탐정 : "내말은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니 당신도 짐작했을 거요."

 사설탐정의 Narration은 영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사건의 삼각구도에서 모든 관계를 매개하는 인물의 Narration과 웃음이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데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인물들의 개개의 욕구 - 레이의 애정에 대한 욕구, 에비의 도피의 욕구, 마티의 돈에 대한 욕구들이 뒤엉켜 사건은 어느새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뫼비우스의 고리처럼 발전하는데, 마티에게 총을 쏘고 순간 한 면을 꼬아버린 존재가 바로 사설탐정이다. 사건의 시작과 끝의 경계는 애매모호하다. 무엇도 명확하지 않은 세상에 부조리란 항상 있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욕구를 향하는 인물들이 처한 세계의 불합리성을 대변하며, 죽는 순간에도 웃을 수 있다. 그의 목은 잘린 뒤에도 기어다니며 사람들 주위를 항상 맴돌 것이다. 그는 카뮈가 되어 관객인 우리를 비웃는다.

 "세상은 불만자로 가득해.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나는 그 Narration을 통해 이 영화는 본질적으로 부조리에 관해 의문을 던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리스처럼 우리는 살인을 직시하지도 않고 돈 문제에도 관여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어차피 사건의 바깥에 있으니까. 두려움을 막 벗어났다는 착각을 하는 에비를 비웃는 그의 목소리가 영화 바깥의 우리에게도 들린다. 살아남은 자에 대한 조롱은 그렇게 관객에게 넘어오는 것이다. 그대, 당신들은 또 어떤 문제를 직하지 못한채 지금 어디서 맴돌고 있느냐 하면서...
영화 속 사건의 명백한 단서들을 보면서 영화를 재미있다고만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진실은 항상 저 바깥에 있으니까. 사설탐정의 웃음이 어울리지 않는 상황처럼 어차피 진실은 우리가 그렇다고 믿고 싶어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자들의 냉소는 결국 우리에게 다시 돌아온다. 우리는 다시 무엇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을 까? 영화 한편을 보고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다시 나를 무겁게 누르기만 한다. 그 무거움에서 헤어나지 못하지만 아직 문제의식을 모두 내던지고 이대로 내 욕구만을 좇으며 살아갈 순 없다는 여명 속 영화보기 자세만이 내겐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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